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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그 역사적인 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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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그 역사적인 날...

이벤트 담당자 2017. 3. 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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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광복이 된지 어느덧 72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이렇게 우리가 발뻗고 편하고 먹고 싶은거 먹으면서 하고 싶은거 왠만큼 다하고 살수 있는 이유가

현재 분단국가 이긴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자유를 보장해 주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일제 통치 시절 우리가 원하던 모든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가 있었죠..


광복이란 대한제국이 붕괴되면서부터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포괄하는 관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이 8·15광복의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1910년 8월 22 일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35년간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은 계속 전개되었습니다.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운동·반침략호국운동이,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민 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3·1운동에는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집결되어 200만 명의 인원이 참가하였으며, 독립이 현대적 국민국가수립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3·1운동 직전 2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3·1운동 직후 4월 13일에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국내에서는 4월 23일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하는 등 곳곳에 정부가 세워졌으며, 1920년대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1910년경 만주지방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간도 삼원보(三源堡)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독립군 3,500명을 수료시키고,

김좌진(金佐鎭)은 간도에서 1,6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연길현(延吉縣)에서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활동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이후에는 독립군부대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설립하였습니다.

국내의 광복운동은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1917년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혁명노선으로 양분되었습니다.

1927년 2월 재통합을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으나 1931년 붕괴되었습니다.

해외에서는 정치단체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으나, 1938년 좌익계 독립운동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민족진영과 좌익사회주의진영으로 양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39년 김구(金九)와 김원봉(金元鳳)이 민족적 통일기구로 전국연합전선협회를 성립시켰으며, 1940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는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무력항전을 전개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신탁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는 카이로선언이 재확인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데 이어 38선 전역을 점령하였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분할안을 제기하였으며,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하였으며, 한반도는 자유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러시아가 점령하였습니다.

광복이 되었으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요인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정계는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여운형의 조선인민 당, 김성수(金性洙)의 한국민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으로 분열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는 한국에 대해 미·영·러·중 4개국의 5년간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으며,

이에 대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탁(反託)을 주장 하였으나, 1946년 1월 2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섰습니다.

한편 1946년 1월 16일 과 1947년 5월 21일 2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10월 18일 무기휴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으며, UN은 1948년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입국을 거부함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 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947년 2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습니다.

1948년 2월 임시헌법을 공포하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남북한에서 각기 단독 정부가 수립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1947년말부터 중도파 정당들을 중심으로 미·러양군의 철수와 남북정당들의 직 접적인 협상을 통한 자주적 남북통일정부수립운동이 추진되어 ,

1948년 4월말 남 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으나 남북한 단독정부수립을 저지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8·15광복을 맞은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미국과 러시아는 한국의 자주독립국 가수립을 원조하기 보다는 각기 자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데 1차적인 목표를 두었으며,

국토분단으로 38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민족분열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전쟁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으며, 평화적 민족통일이 8·15광복 이후 우리민족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성격으로 일어난것이 아닌 강대국의 힘싸움에 의해서 발발한 것으로

나라가 강하지 못하면 역사가 비참해진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분단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 및 88올림픽 개최등 찬란한 기술 및 발전으로 지금은 경제 대국이 되어 있지만

이전의 아픔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분단의 끝이 평화적인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정상적이고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광복운동에 힘써온 우리 조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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